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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뉴스클리핑 - 시각장애인 그리고 봉사와 소경 <문화저널21 2011.08.03>

작성자협회관리자

작성일시2011-08-12 오전 10:2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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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溫達)은 고구려 평원왕(559~590) 때 사람이다. 얼굴은 못 생겼으나 마음씨는 아름다웠고 집이 가난하여 걸식으로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어진 신발로 저자거리를 오가니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했다.

묘관음사 앞뜰의 자란(紫蘭)
▲ 묘관음사 앞뜰의 자란(紫蘭)     © 이복남

평원왕에게는 어린 딸 평강공주가 있었는데 공주가 잘 울어서 왕은 “네가 항상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사대부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겠다.”고 말 했다. 

공주가 16살이 되어 왕이 고씨(高氏)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자,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야겠다.'고 하시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전에 하신 말씀을 바꾸려 하십니까? 평민들도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하는데, 하물며 지존(至尊)하신 분께서 거짓말을 하셔서야 되겠습니까?”

공주가 왕의 뜻을 따르지 않자 왕은 대노하여 공주를 내쫓았다. 남아일언 중천금이라 했거늘 하물며 임금이 허튼소리를 했으니 공주가 노할 만도 했으리라.

공주는 금팔찌 수십 개를 차고 궁궐을 나와서 물어물어 온달의 집을 찾아 갔다. 집에는 늙은 어머니가 혼자 있었는데 공주가 가까이 다가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묻자 온달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하니, 귀한 분이 가까이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남다르고,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마치 솜과 같습니다. 반드시 귀한 사람일 텐데 누구에게 속아서 이곳에 왔습니까? 내 아들은 배고픔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러 간지 오래 되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온달의 어머니는 그렇게 공주를 거절했지만 공주는 온달을 기다렸다. 공주가 만난 온달도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공주를 거절했다.

그러나 공주는 가난하더라도 마음만 맞으면 함께 살 수 있다며 어머니와 온달을 설득했고 금팔찌를 팔아서 일상생활의 용구를 모두 갖추었다.

“절대로 시정 사람이 파는 말은 사지 말고, 임금이 타던 말 가운데 병들고 여위어 내 버린 것을 가려 사 오십시오.” - 임금이 타던 말은 준마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병든 말이라도 잘만 기르면 보통의 말보다 뛰어날 것이다. 온달은 공주가 시키는 대로 했다. 공주는 말을 길러 온달에게 승마를 가르쳤다. 

고구려 풍속에 해마다 삼월 삼짇날이면 왕과 신하들이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행사에는 온달도 그동안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남보다 빨리 달렸고 짐승도 많이 잡았으므로 따를 자가 없었다. 왕이 그를 불러서 이름을 알고는 놀라며 특별히 칭찬을 하였다. 그로부터 왕은 온달을 사위로 인정하여 온달장군은 많은 공을 세웠으나, 신라에 빼앗긴 땅을 회복하고자 출전했다가 아차산성(阿且山城)에서 전사하였다. 

이상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권45에 나오는 온달전의 이야기다. 왜 이 이야기를 하는 고 하면 온달은 고구려 사람인데 온달의 어머니가 맹인이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내행지기가, 견맹로모, 근전배, 문기자소재, 노모대왈)’라고 기록되어 있다. 집에는 눈멀고 늙은 어머니(盲母)가 혼자 있었는데 공주가 가까이 다가가서 절하고, 그 아들이 있는 곳을 묻자 온달의 어머니가 말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구성되어 있다. 안이비설신의(눈귀코혀몸생각)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장애가 생긴다면 일상생활에서 여러 가지로 불편하겠지만 현재의 장애인복지법에서 코는 제외인데 그 대신 신(몸)에서 간 신장 심장 호흡기 등 내부장애를 인정하고 있다.

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고 하듯이 눈의 중요성은 아주 오래 전부터 강조되었다. 그런데 눈 목(目)이라는 글자는 홀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좌우 또는 아래위에 붙어 眼(안), 相(상), 盲(맹) 등이 되기도 한다. 맹(盲)자를 보면 눈 위에 망할 망(亡)자가 붙어 있으니 눈이 망했다, 즉 눈을 감아 앞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시각장애인은 맹인이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고구려의 온달의 어머니가 맹인이었다. 그 밖에도 백제 개루왕(지위 128~166)은 도미(都彌)의 아내를 탐내어서 도미의 눈을 멀게 하였고, 신라 진흥왕(540~576) 때 제후는 맹인 백운과 혼인하였다. 진성여왕((재위 887~897) 때 지은(知恩)은 곡식 300석에 몸을 팔아 눈 먼 어머니를 봉양하자 여왕이 이를 알고 곡식 500석을 하사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맹인을 찾아보니 세종 32권 8년에 ‘소경들이 명통사에 모여 비 오기를 빌다(盲人等會于明通寺祈雨)’고 했는데 원문에는 맹인이라고 되어 있었다. 태조 5권 3년에는 ‘장님(盲人) 이흥무(李興茂)에게 점을 쳤는데’와 같이 한글은 장님이고 한자는 盲人이라고 표기 된 곳도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24권, 12년/세종32권 8년/세종106권 26년에 기입된 명시각장애인의 명칭-장님, 맹인,소경
▲ 맹인,소경,장님/조선왕조실록     © 이복남
 
세종 54권 13년에 ‘관현의 음악을 맡은 장님은 모두 외롭고 가난하여 말할 데가 없는 사람들로서(管絃之盲, 皆孤寒貧窮無告之人)’ 이곳에서도 맹인을 장님이라 번역하였다. 그리고 세종 75권, 18년에는 ‘이보다 앞서 판수 지화(池和) 등이 상언하여(前此, 盲人池和等上言)’ ‘만약 장님으로 하여금 내시를 삼는다면(若使盲人爲之)’ 등과 같이 盲人을 판수라고도 하고 장님이라고도 했다. 비장애인들에게는 장님이나 판수나 소경이 맹인이나 다 눈 감은 사람들을 지칭하므로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르겠지만 시각장애인를 부르는 명칭이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를 찾는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같은 맹인은 삼국시대, 고려, 조선을 거쳐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지만 1981년 장애인복지법이 처음 제정될 때는 언어순화 차원에서 시각장애인이라고 했다.

‘제2조(정의) 이 법에서 "심신장애자"라 함은 지체부자유, 시각장애, 청각장애, 음성·언어기능장애 또는 정신박약 등 정신적 결함(이하 "심신장애"라 한다)으로 인하여 장기간에 걸쳐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에 상당한 제약을 받는 자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해당하는 자를 말한다.’[심신장애자복지법](제정 1981.6.5 법률 제3452호) 

눈이 멀어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을 맹인 또는 장님이라고 했는데 장(杖)님은 지팡이를 짚은 님이다. 국어사전에 ‘장님이란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지만 원래는 높임말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맹인이라는 말 보다는 소경과 봉사를 더 많이 사용한 것 같다. 심청전의 아버지가 심봉사였고, ‘소경 제 닭 잡아먹기’ 등 소경에 관한 속담이나 이야기도 부지기수다. 

고려시대에는 맹인들이 주로 점을 쳤는데 이들을 매복맹인(賣卜盲人)이라고 했다. 고려에서는 매복맹인들에게 검교라는 직책을 내렸다고 한다. 검교(檢校)란 벼슬 이름 앞에 붙이는 말이라는데, 소경(少卿)은 종4품 관직명이다. 
 
태종 33년,17년 명통사 수리
▲ 태종 17년 명통사 수리/조선왕조실록     ©이복남

조선시대에는 매복맹인 외에 관현맹인(管絃盲人)이 있었다. 맹인들은 점을 치고 기우제를 지내고 악기를 연주했다. 조선시대에는 태종 때부터 비가 오지 않으면 명통사(明通寺)의 맹인들을 불러 기우제를 지내게 하고, 명통사 맹인들에게 곡식을 하사하기도 했다. 

명통사는 맹인들이 기거했던 절이라고도 하고, 조선의 공적기관이자 시각장애인단체라고도 한다. 나라에서 명통사를 새로 짓고 노비를 내렸다면 공적기관인 것 같기도 한데, 조선전기의 명통사가 조선후기에는 맹청이 되었다고 한다. 寺가 절일 때는 사로 읽고, 관청일 때는 시로 읽는다는데 명통사가 설사 절이라고 해도 기우제 지내고 독경하는 맹승은 불교의 승려가 아니라 도교의 도류승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매복맹인 뿐 아니라 관현맹인도 있었고, 나라에 일이 있을 때는 독경도 하고 기우제도 지냈다. 시각장애인이나 부모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봉사라는데 봉사는 조선시대 종 8품 관직명이다. 조선시대는 맹인들에게도 관직을 내렸으니 봉사도 받았으리라. 동의보감의 허준도 초장기에는 내의원 봉사였다.

전통사회에서 그나마 맹인은 여러 가지 직업이 있었으나 직업이 없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에게 왕은 사회복지의 일환으로 구휼정책을 펼쳤는데 주로 환과고독(鰥寡孤獨)이었다. 환과고독이란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회복지 대상자를 이르는 말이다. 홀아비 환, 적을 과, 외로울 고, 홀로 독으로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다.

맹인들은 환과고독에 속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있었을 것이지만, 시대와 더불어 매복맹인이나 관현맹인도 저물어 갔다. 그리고 1898년 로제타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9.19. ~ 1951.4.5.) 여사가 평양에서 맹인 오봉래에게 점자를 가르친 것이 우리나라 특수교육의 효시라고 한다.

홀여사와 오봉래/한국시각장애인의 역사
▲ 홀여사와 오봉래/한국시각장애인의 역사     © 이복남
 
1981년에 장애인복지법이 제정되면서 맹인은 시각장애인으로 순화되었지만 사회에서는 여전히 맹인으로 통용이 되고, 비하용어로 봉사와 소경 그리고 고자(瞽者)와 장님이 불려졌다. 

시각장애인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것으로 ‘장님 개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자기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만 탓한다는 뜻’인데 물론 전통사회에서나 가능한 말이다.

요즘 만약에 시각장애인이 개천에 빠졌다면 절대로 개천을 나무라서는 안 된다. 개천은 언제나 그곳에 있는 것이고, 그 개천에 시각장애인이 빠질 수 있도록 보호막이나 점자(유도블럭) 등의 편의시설을 제대로 설치하지 않은 관계당국을 질책해야 할 것이다. 

어쨌거나 정신박약이 정신지체(현 지적장애)로 바뀌는 등 장애인 관련 용어가 순화되자 전국의 맹학교들도 교명을 바꾸기 시작하였다. 서울맹학교 부산맹학교 등은 동창회에서 교명변경을 반대했다고 한다. 현재 전국에 시각장애인학교는 총 13개교이다. 이 중에서 대전 부산 서울 등 6개 학교는 원래의 교명인 맹학교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7개 학교는 명진 세광 등으로 교명을 변경하여 일반 사람들은 시각장애인 학교임을 잘 모르고 있다.

대전맹학교 부산맹학교 서울맹학교 전북맹아학교 청주맹학교 한빛맹학교 강원명진학교 광주세광학교 대구광명학교 은광학교 인천혜광학교 제주영지학교 충주성모학교 등 총 13개교.
▲ 전국 시각장애인학교/한국특수교육총연합회     © 이복남

대전맹학교 부산맹학교 서울맹학교 전북맹아학교 청주맹학교 한빛맹학교 강원명진학교 광주세광학교 대구광명학교 은광학교 인천혜광학교 제주영지학교 충주성모학교 등 총 13개교.

어쨌거나 필자가 이렇게 시각장애인에 대한 명칭을 들고 나온 것은 며칠 전 언론에 나온 맹지(盲地) 때문이다. 

한상대 검찰총장 내정자에 대한 청문회에서 탈세 의혹이 불거졌다. 그러자 한상대 내정자는 “행당동 땅은 남의 땅에 둘러싸여 출구가 없는 맹지로서 사용 가치가 없어 낮은 가격에 팔았다.”며 탈세 의혹을 부인했다. 

언론에서 한상대 내정자와 관련해서 맹지라는 말이 반복되자 도대체 맹지가 무슨 말인가 싶어서 인터넷에서 찾아보았다. 네이버 백과사전에 의하면 ‘맹지(盲地)란 도로와 맞닿은 부분이 전혀 없는 토지.’라고 한다. 

맹지란 부동산 신조어라고 하는데 검찰총장 내정자가 맹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필자는 맹지를 전혀 몰랐었으니 필자의 무식함을 어찌하랴.

맹지란 도로가 없는 땅이란다. 눈(目)이 망(亡)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맹(盲)이라고 하는데, 길이 없어서 망한 땅을 맹지(盲地)라고 했던 것이다. 맹지를 찾다보니 재미있는 단어들이 몇 개 더 있었는데 우리가 익히 아는 문맹 외에 돈맹 길맹 컴맹 등이 있었다. 

한상대 검찰총장 내정자가 맹지를 팔면서 탈세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내정자의 맹지 덕분에 앞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 관련 용어를 다시 한 번 찾아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니 고마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