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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솔빛 - [173호]자라섬 여행기-서해웅(시각장애1급, 서울시 은평구)

작성자담당자

작성일시2014-12-19 오후 3:3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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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라섬 여행기 / 서해웅(시각장애1급 ․ 서울시 은평구)


  버스는 예정보다 30분 정도 늦게 출발했다. 복지관 직원들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내심으로 이미 짐작한 대로였다. 10시에 모이기로 해서 10시 30분에 출발했다면 아주 다행스러운 일이다. 시각장애인들이 특별히 약속 시간을 못 지킨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낯선 곳을 찾아가는 데는 아무래도 장애유무를 떠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고 늘 여행이란 예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마련인 것이다. 그게 여행의 맛이기도 하기에 제 시간에 온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그다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친구는 나를 버스에 태워주고 나서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직장으로 갔다. 같이 자라섬에 가자고 거의 한 달 전에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회사는 이틀 전에 주말 근무를 요청했다. 요청인지 명령인지 뭐 다를 것은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나는 잠시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10만 명이 넘게 찾는다는 자라섬에 보조인 없이 간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친구가 내게 미안해하기도 하고 걱정을 하기도 하며 또 자신도 아쉬워하면서 나를 버스에 올려주고 갔을 때 약간의 불안함과 적적함이 안개처럼 나를 감쌌다.

 

  여행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불러오는 이상한 힘이 있다. 점심을 먹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약시자 분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봉사자분이 선뜻 나를 돕겠다고 나서 주었다.

 

  점심을 먹고 수목원에 들렀다.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봉사자 분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참 재미있는 친구라는 생각이 들어 점차 서로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게 되었다. 나이며 직장이며 출신 학교며 학창 시절 이야기도 서로 나누며 공감하기도 하고 질문을 주고받기도 했다. 금세 친해져서 서로 장난도 치고 진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는 봉사자 분은 몇 년 전에도 봉사활동차 자라섬에 와보았노라 말했다. 그때보다 몇 배나 규모가 커진 것 같다며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때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상대로 재즈 페스티벌을 안내하는 역할이었다고 했다. 고등학교 시절 홍콩에서 지내다 와서 영어에는 능숙했고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다 보니 외국인을 상대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고 했다. 나와는 다른 환경에 살고 있는 사람을 만나 이렇게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더불어 서로 직장 생활의 어려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사회 초년생이다 보니 조직생활의 어려움이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 대해 많은 공감을 했다.

 

  혹시 내년에 자라섬에 가게 된다면 반드시 두터운 패딩을 챙겨가야겠다고 다짐할 만큼 자라섬은 추웠다. 추워도 엄청 추웠다. 넓은 잔디밭에 앉아 돗자리를 깔고 덜덜 떨면서 재즈를 들었다. 음악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날씨는 정말 추웠다. 봉사자분이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내 주었다. 이 목도리가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 감기에 걸렸을 것이다. 복지관에서 두꺼운 옷을 챙겨 오라는 문자를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겨울처럼 추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재즈를 들으며 피자와 치킨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어느 새 어두워지고 밤이 되어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한참 음악에 빠져 듣고 있는데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축제는 아마 늦은 시간까지 이어질 모양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라섬을 나와 서울로 돌아왔다.    

 

  나는 만남을 좋아하고 중요하게 생각한다. 어느 한 사람이 누구를 만나고 어떤 느낌을 받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와 다른 영역에서 지내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고 알고 싶어 한다. 지금은 비록 시각장애인으로 한정된 시공간안에 살고 있지만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좀 더 다른 각도에서 보고 싶다. 순수한 지적 호기심일수도 있고 사람에 대한 궁금증일 수도 있다. 사람을 만나는 데는 여행만 한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일반 사람들한테만 해당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이번 자라섬 여행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을 접할 수 있었다. 화면해설자,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 또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는 시각장애인까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쩌면 자라섬에 재즈를 들으러 간 것이라기보다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러 간 것 같았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또 다음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